결론부터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총선이 아직 6개월이나 1년 남은 시점에서 선거결과를 예측할수 있다고 떠드는 사람은 사기꾼이거나 괜히 잘난체 하는 사람이다. 실제 워낙 변화무쌍한 우리나라 정치판이고 실제 지난 30여년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를 살펴보면 대선이나 총선,지선같은 큰 선거를 코앞에 앞두고 당에 분열이 일어나기도 하고 (87년 10월. 김대중과 동교동계가 탈당하여 평화민주당 창당 선언), 새롭게 신당이 창당되기도 하며 (92년 1월. 정주영의 통일국민당 신당창당 선언, 16년 1월. 안철수의 국민의당 창당선언) 두 개의 정파가 전격 합당선언을 한 사례도 있다. (14년 3월. 민주당과 안철수측 ‘새정치 민주연합’으로 전격 합당선언)
따라서 이렇게 전국단위 큰 선거를 불과 두어달 앞둔 시점에 정파 자체가 달라질정도로 요동치는 선거판에서 6개월이나 1년남은 선거를 예측하네 어쩌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소리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선거를 반년이나 1년이상 앞둔 시점부터 여론조사기관이나 언론이 앞다퉈 총선이나 대선관련 이런저런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것 매우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요즘은 너무 많은 여론조사 기관과 언론들이 조사방식이나 기법도 차이가 나는 여러 가지 여론조사를 앞다퉈하며 주요 정파들은 또 앞다투어 그렇게 우후죽순격으로 쏟아지는 결과를 놓고 ‘아전인수식 해석’에 열을 올리기 때문에 이로인한 조기 선거분위기 과열과 ‘정치과잉 현상’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전체 유권자들에게 혼란과 혼동만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현상을 극도로 싫어한다.
하지만 반년후 총선 결과를 지금 예측하는건 힘들더라도 한가지 분명하게 말해줄수 있는 것은 있다. 역대 총선결과를 살펴보면 ‘자만한쪽’이 패한적이 많다는 ‘징크스’다. 가령 71년 8대 총선의 경우 원래 대선패배(71년 4월)의 후유증을 제대로 치유하기도 전에 치르는 총선인데다 당시 신민당 유진산 당수가 자신의 지역구를 포기한 것을 두고 ‘당수가 지역구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의 도마에 오르는 이른바 ‘진산파동’이 일어나 당이 사실상 양분된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야당인 신민당의 상황이 이런 상태에서 치르는 총선이다보니 당시 공화당측은 ‘이러다 북한처럼 일당독재가 될까봐(그 정도 수준의 압승을 하는) 걱정된다’는 행복한 고민까지 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허나 막상 선거 뚜껑을 열어보니 신민당의 의석수는 총 89석(당시 의원정수 204명)으로 대거 약진. 7대때 45석보다 당세가 두배이상 불어났고 야당이 사분오열된 상태에서 치른 6대총선(민정당(民政黨) 41석, 민주당 13석, 자유민주당 9석)보다도 훨씬 의석수가 늘어난 결과가 나왔다. 단순히 의석수 증가만 중요한게 아니라 3선개헌(69년 9월) 같은 날치기 통과를 여당이 일방적으로 할 수 없는 3분의1 이상의 ‘개헌저지선’을 확보했다는 중대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
13대 총선(88년)의 경우 역시 야당은 양김이 분열되어 치른 대선패배에 이어 야권통합 논의가 몇 번 있긴했지만 흐지부지 무산되고 이런 상황에서 치르는 선거였다. 당시 기억에 한 라디오 시사칼럼 프로에선 이런 논평을 내기도 했다. (88년 3월경) ‘한쪽(여당)은 이미 선수가 링위에 올라 폼까지 잡고 있는데 한쪽(야당)은 아직 선수도 정하지 못한상태’라며 사실상 야당 지지자들 입장에서 답답하고 딱한 선거결과가 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취지의 선거판세 분석인 셈이다.
하지만 이 총선이야말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등 야3당이 각개약진 민정당은 헌정사상 최초로 여당이 원내 과반을 이루지 못하는 참패를 기록한 총선이 되었다. 삼김이 지역으로 갈라져 각 지역마다 확실한 맹주가 되어버린 결과이기도 했지만 역시 총선 직전까진 자만했던 여당(민정당(民正黨)이 참패하고 패할줄 알았던 야당이 승리한 또다른 대표적인 사례다.
2016년 치러진 20대 총선이 아마 이 맥락을 잇는 사례가 될듯하다. 역시 당시 야당인 소위 친문-비문의 갈등으로 당이 양분된것이나 다름없다가 결국 비주류와 동교동계 일부가 탈당 안철수의 ‘국민의당’에 합류했고 이런 상황에서 야당의 참패와 여당은 내심 소위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시킬수 있는 180석 이상을 확보할수도 있겠다며 우쭐해있었다. 허나 막상 선거를 치러보니 민주당은 수도권에서 3분의2 이상의 지역에서 승리하며 123석의 원내 제1당이 되었고 호남을 석권한 안철수의 국민의당 역시 38석을 확보 두당을 합하면 160석의 ‘거대야당’이 탄생하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이정도 수준으로 선거 직전의 분석과 결과가 완전히 뒤집힌 정도가 아니지만 04년 17대 총선의 경우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선거 한달전부터 열린우리당이 200석 이상의 거대여당이 될수있는것같은 여론조사 결과가 계속 나오긴 했지만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가 맹활약하고 열린우리당의 경우 정동영 의장의 ‘노인폄하발언’등의 곤욕을 치르면서 과반수만 겨우 넘긴 152석의 ‘원내 제1당’이 되는것에 만족해야했다.
반대로 18대 총선은 07년 17대 대선을 치른 직후에 치러진 선거로 사실 07 대선의 당선자와 타후보간의 득표율 격차를 보면 넉달후 총선에서 10년만에 여당이 된 한나라당이 역시 200석을 넘는 초압승이라도 할것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허나 이 선거 역시 친박연대라든가 이회창의 ‘자유선진당’의 뜻밖의 선전으로 한나라당 역시 153석의 과반수만 살짝 넘긴 의석수의 ‘원내 제1당’의 지위로 복귀하는것에만 만족해야 했다.
반면 야당이 자만해 패한 총선도 있다. 96년 15대 총선의 경우 당시 김영삼 정권의 경제실정과 이로인한 지지율 하락으로 여당인 신한국당의 패배와 정계복귀를 선언한 김대중 총재의 ‘새정치 국민회의’의 승리가 예상되던 선거였다. 주요언론도 국민회의가 수도권 포함 100석 이상의 당선자를 내거나 심지어 ‘원내 제1당’도 가능하다는 분석까지 내놓고 있었고 심지어 이런저런 시사주간지(* ‘일요신문’등 ^^;;)들은 김대중의 국민회의가 내심 ‘서울 강북지역 석권’을 목표로 하거나 ‘원내 제1당이 될 경우 상임위원장을 전부 야당의원을 앉히려 한다’는 정치권 내부 이야기까지 보도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와같은 분위기가 ‘문민정부의 실패를 바라지 않는’ 보수 중산층의 위기감과 표 결집현상을 불렀는지 신한국당은 이례적으로 수도권에서 선전했다. 비록 과반수에는 못미쳤지만 139석으로 ‘원내 제1당’을 유지하며 참패를 면할수 있었다. 반면 애초 ‘100석 이상’도 가능하다고 하던 국민회의는 기존 60여석에서 의석이 10여석정도 늘어난 79석의 당선자를 내는데 만족해야 했다. 참고로 ‘새정치 국민회의’는 원래 14대 대선(92년)에서 패한 김대중 총재가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이기택 대표등이 이끌던 민주당을 김총재가 다시 정계복귀를 선언하며 창당한 신당이었다. 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원래 97석의 당선자를 냈었다.
‘국민은 야당이 약할 때 밀어준다’는 말이 있다. 군사정권시절 모든 것이 야당에게 불리하고 불합리헀던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던 시절 일반 국민들중 야당의 그런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야당의 사정이나 문제는 어느정도 봐주는 그런 경향과 기류가 분명 있었다. 또 잘 모르는 사람들중에도 젊은층이나 어느정도 반정부 성향을 띤 이들은 지긋지긋한 군사정권이 이제 좀 끝났으면 하는 바램에서라도 어느정도 야당편을 들어주는 이들도 있었다.
허나 작금의 170여석을(무소속으로 가있는 민주당 출신 포함) 갖고있는 민주당을 결코 ‘약한 야당’이라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막상 역대 총선 결과를 살펴보면 자만한쪽이 패하거나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해 낭패를 본일도 종종 있다는 것이다. 22대 총선이 어느덧 6개월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아무래도 주요 양당은 ‘자만하면 패망한다’는 구호라도 지도부 회의실에 크게 써붙여놓고 선거에 임해야 할것같다.
경제 민생 문제를 일ㅈ으키는 당이 패한다는건
논란의 여지가 없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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