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집을 1000채 갖고 있다고 하면 입이 벌어지게 된다. 누군가가 '여기서 저 끝까지 우리 땅', '여기서 저 끝까지 우리 건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나가모리 도키치로(長森藤吉郞)도 그 '누군가'가 될 뻔했다.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부동산 큰손이 될 뻔했던 일본인이다.
나가모리는 '여기서 저 끝까지' 정도가 아니라 제주에서 함경도까지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는 단계 직전까지 갔다. 하마터면 이 땅이 '나가모리의 나라'가 될 수도 있었다. 송수만(宋秀萬) 같은 항일 투사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국가보훈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지만, 그는 국토 상당 부분을 지켜내는 데 일조한 기념비적인 독립운동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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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소유한 황무지를 특정 일본인의 명의로 확보한 뒤 다른 일본인들에게 분양하자는 계획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일개인'이 전 대장성 관방장인 나가모리 도키치로다. 나가모리를 일종의 '바지 사장'으로 내세워 한국 땅을 차지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라인 사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음모가 을사늑약 전년도인 120년 전 갑진년에 있었다.
일본의 요구를 반대하는 국민운동
위 내각 결정에 이어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는 하야시 곤스케 주한일본공사의 그해 7월 6일 자 외교 공문이 대한제국에 전달됐다. 나가모리와 그 상속인 혹은 승계인이 50년간 권리를 갖게 하고 기한 연장이 가능케 해달라는 공문이었다. 50년 뒤에 연장되지 않으면 투자 원금과 연 5% 이자를 일시불로 지급해야 한다는 벌칙 조항도 담긴 것이었다.
어차피 쓰지 않는 황무지를 일본인이 개간해주면 일단은 좋은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황무지냐 아니냐 하는 판단은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다. 주차장으로 쓰는 땅도 보기에 따라서는 황무지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일본이 한국 토지 대부분을 황무지 명목에 집어넣고 강제로 가로채려 한다는 의구심을 품었다.
그해 7월 10일 자 <고종실록>에 따르면, 제사 등을 관장하는 봉상사(奉常司) 부제조 이순범은 국유지나 민유지 중에서 등록된 것은 10분의 1, 2밖에 안 된다며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면 실질적으로 국토의 8, 9할이 황무지 명목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 미등록 토지 대부분이 황무지로 간주돼 나가모리의 땅이 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이런 우려로 인해 일본을 비판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이에 힘입어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일본은 개의치 않고 압박의 강도를 높여갔다. 이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송수만이다. 그는 그해 7월 13일 심상진(沈相震)·원세성(元世性) 등과 함께 보안회(輔安會)를 결성해 일본의 요구를 반대하는 국민운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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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 위한 준비 작업임을 간파
▲ 일본이 주권 침탈의 일환으로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해 오자, 송수만은 보안회를 조직하고 극력 반대해 마침내 철회시켰다.
ⓒ EBS
그로부터 9년 뒤인 1904년에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맞서 또다시 궐기한 그는 이듬해인 1905년 을사늑약 때도 일본에 맞서다가 구금됐다. 1904년 7월 13일의 보안회 창립총회 때 그는 100여 명의 청중을 상대로 황무지 대여의 부당성을 역설하면서 이에 동조한 친일 인사들을 성토했다. 이 집회는 대한제국 경찰과 일본 헌병들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보안회 집회는 14일과 16일에도 있었다. 16일의 서울 종로 집회 때는 송수만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는 일이 있었다. 1994년에 <사회와 역사> 제44권에 실린 신용하 서울대 교수의 논문 '구한말 보안회의 창립과 민족운동'은 그날 비가 내렸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집회 참석자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경찰들은 집회장에 들어가 송수만을 강제 연행하려 했다. 대한제국 경찰이 이의를 제기하자 일경들은 몽둥이로 한국 경찰을 제압했다. 이 광경을 본 시민들이 일경들에게 달려들자,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일본 기업인이 권총을 꺼내 발사하는 일이 일어났다.
일본 군경뿐 아니라 일본 민간인까지도 한국에서 권총을 꺼낼 수 있었던 시절이다. 그래서 멀쩡한 땅을 황무지로 규정한 뒤 '황무지는 우리 땅'이라며 넘기라는 요구도 나올 수 있었다.
자국 기업인이 발포해 주는 황당한 상황을 이용해 일경들은 송수만 강제 연행에 성공했다. <기려수필>에 따르면, 끌려간 송수만은 한국 땅을 달라는 요구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고사시키기 위한 것"이라며 우방 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본 관헌들을 나무랐다.
송수만이 체포된 뒤에도 보안회는 투쟁의 강도를 높여갔다. 고종이 집회 금지령에 이어 단체해산령까지 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7월 20일과 21일에도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21일 집회 뒤에는 각국 공사관을 상대로 홍보 활동까지 벌였다. 이 문제를 글로벌 이슈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7월 21일 집회 때는 일본군 100여 명이 동원됐고, 22일 집회 때는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투입됐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아닌 한국 대중이 궐기하는 이 상황을 일본은 어쩌지 못했다. 결국 일본은 송수만의 신병을 한국 경찰에 인도하는 방법으로 한발 물러섰고 7월 30일 고종은 일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공식 천명했다.
1908년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돼 식민지 경영을 본격화하기 전까지 일본은 이 문제에 손을 대지 못했다. 나가모리 명의로 넘어갈 뻔했던 한국 땅이 송수만과 보안회를 비롯한 한국 국민들의 공동 투쟁에 힘입어 몇 년간이나마 무사했던 것이다.
그 시절 일본 당국자들도 한일 경제협력을 입에 달고 살았다. 송수만은 그것이 전면 침략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임을 간파했다. 멀쩡한 땅을 황무지로 부르며 이를 개간해 주겠다며 접근하는 일본을 상대로 그처럼 강렬한 투쟁을 벌인 것은 그런 위험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한국 국민이 나선 1904년의 항일투쟁 대열을 송수만이 이끌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인정하지 않지만, 제국주의에 맞서 한국 땅을 지켜낸 그의 투쟁이 우리 역사에 기여한 공로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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