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국보 제119호로 지정된 금동연가칠년명여래입상은 문화재 애호기간 특별전시를 위해 덕수궁 박물관에서 덕수궁 미술관으로 옮겨져 2층 제3관에서 전시 중이었다. 그런데 1967년 10월 24일 오전 10시 40분경 순찰 중 경비담당자가 입상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어 경찰에 신고했다.
원래는 10월 23일 전시를 마치고 덕수궁 박물관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다음날인 국제연합일(UN창설일)이 공휴일[1]이었기 때문에 10월 24일 하루 더 전시하고 돌아가기로 했던 참이었다.
불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범인이 푸른색 볼펜으로 쪽지를 써서 남겼는데 "국장님[2]께 직접 알려라. 세계 신기록을 위해 24시간 안으로 돌려주겠다. 타인에게 알리는 약은 수작을 부리면 죽은 아이 귀 만지기격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발칵 뒤집힌 경찰은 필적의 감정을 의뢰하고 입상을 전국에 지명수배했지만 어떤 단서도 없이 사건 수사에 진척이 없는 채로 시간만 흘러갔다. 범인은 오전 11시, 오후 3시, 오후 6시에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자신이 훔쳤다고 말했으며 그런가 하면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앞의 태궁이라는 다방에 "생활이 어려워서 일시적으로 저질렀다. 곧 돌려주겠다."라는 쪽지를 남겼다.
오후 11시 5분경 범인은 다시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금불상을 훔친 범인이다. 금인줄 알고 훔쳤는데 금도 아니고, 귀중한 물건이란 걸 신문이나 뉴스에서 알게 돼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알려주겠다. 한강철교 제3교각 16번,17번 침목 받침대 사이에 숨겨두었으니 와서 찾아가라"는 말을 남겼다.
문화재관리국장은 당장 기사와 부인을 깨워서 범인이 말한 장소를 찾아 20분여간 그곳을 뒤진 끝에 마침내 입상을 찾아내 국립중앙박물관 귀금속실로 옮겨 엄중히 보호했다.
경찰은 범인이 단순히 입상을 돈을 위해서 훔친 게 아니라 뭔가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집중했으며 범인이 전시장인 덕수궁 미술관의 구조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일 거라고 보고 관련자들을 심문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 뒤 1974년 10월 24일에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수사 당시 한 경찰국장은 "쇠붙이 하나 없어진 거 가지고 왜 그리 난리들이냐"라는 망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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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중생들
개인이 어렵게 어디선가 낙찰 받은 문화재를 지금은 날로 먹을려는 것 같은데
잘 안주나봐요
원래는 10월 23일 전시를 마치고 덕수궁 박물관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다음날인 국제연합일(UN창설일)이 공휴일[1]이었기 때문에 10월 24일 하루 더 전시하고 돌아가기로 했던 참이었다.
불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범인이 푸른색 볼펜으로 쪽지를 써서 남겼는데 "국장님[2]께 직접 알려라. 세계 신기록을 위해 24시간 안으로 돌려주겠다. 타인에게 알리는 약은 수작을 부리면 죽은 아이 귀 만지기격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발칵 뒤집힌 경찰은 필적의 감정을 의뢰하고 입상을 전국에 지명수배했지만 어떤 단서도 없이 사건 수사에 진척이 없는 채로 시간만 흘러갔다. 범인은 오전 11시, 오후 3시, 오후 6시에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자신이 훔쳤다고 말했으며 그런가 하면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앞의 태궁이라는 다방에 "생활이 어려워서 일시적으로 저질렀다. 곧 돌려주겠다."라는 쪽지를 남겼다.
오후 11시 5분경 범인은 다시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금불상을 훔친 범인이다. 금인줄 알고 훔쳤는데 금도 아니고, 귀중한 물건이란 걸 신문이나 뉴스에서 알게 돼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알려주겠다. 한강철교 제3교각 16번,17번 침목 받침대 사이에 숨겨두었으니 와서 찾아가라"는 말을 남겼다.
문화재관리국장은 당장 기사와 부인을 깨워서 범인이 말한 장소를 찾아 20분여간 그곳을 뒤진 끝에 마침내 입상을 찾아내 국립중앙박물관 귀금속실로 옮겨 엄중히 보호했다.
경찰은 범인이 단순히 입상을 돈을 위해서 훔친 게 아니라 뭔가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집중했으며 범인이 전시장인 덕수궁 미술관의 구조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일 거라고 보고 관련자들을 심문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 뒤 1974년 10월 24일에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수사 당시 한 경찰국장은 "쇠붙이 하나 없어진 거 가지고 왜 그리 난리들이냐"라는 망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나무위키
이런 정보를
어디서 얻나?..
감사합니다.^^
수 많은 민간인까지 죽인 유골조차 안나오냐? 나오는건 교회안에서 먹사에게 삥뜯긴 기록과 성범죄만 나오냐? 그것도 유물인가?
내가 51세인데
나보다도 띠동갑도 더되보이네
효심있고 착한분을 부처님이 도와주신거군요ㅠ
문화재청이 투명해 보이지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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