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
2010년 6월 17일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한자) 쓰는 사람만 다냐, 글(한자)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 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擊)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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