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재산 2조를 독립운동을 위해
기꺼이 내 놓으신분.
이석영(李石榮)[1855~1934]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이항복(李恒福)의 10세손이다. 아버지는 이유승(李裕承)이다. 여섯 아들 중 둘째이며, 형제로는 이건영(李健榮), 이철영(李喆榮),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호영(李護榮)이 있다. 아들로는 이규준과 이규서가 있다. 1885년 이유원(李裕元)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855년 12월 3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에서 태어났다. 1885년 이유원의 양자로 입양된 후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에 해당하는 양주군 화도면 가곡리 임하려(林下廬)에서 거주하였다. 1885년 9월 15일 증광별시에 급제하였고, 1886년 9월 20일 가주서로 관직을 시작하여 이조참의·예조참의·형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참찬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 3월 14일 장례원소경을 끝으로 관직에 나서지 않은 채 후학 지원, 육영 사업 등에 전념하였다.
1910년 양주군 화도면 가곡리 소재 임야 572만 2314㎡[577정보]를 포함한 방대한 재산을 처분한 뒤, 1910년 12월 30일 이건영·이철영·이회영·이시영·이호영 등 다른 형제들과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1911년 한인 자치 기구 경학사를 창설하고, 신흥강습소를 개소하였다, 신흥강습소는 1913년 신흥중학교로 개칭하였고, 1919년 신흥중학교를 폐지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하였다.
1920년 중국 펑텐[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선양[瀋陽]], 1922년 톈진[天津], 1926년 베이징[北京], 1932년 상하이[上海]로 이동하였고, 1934년 2월 28일 상하이에서 사망하였다.
이석영은 중국 상하이 홍교(虹橋)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정도로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는건데, 그걸 누구한테 다 팔았을지 궁금하네요.
상황이 그러하니 가만히 땅을 갖고 있다가는 고대로 일본놈한테 빼앗길게 예상되겠죠.
그러니 어서 팔고 현금화 하는게 낫겠다 싶을듯 하네요.
그런데 그정도를 사들일 재력가가 있었을까와 그런 재력가들이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땅을 사재기를 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을지도요.
아님 일본놈들한테 팔았을지도 모르겠다 싶네요.
그리고 땅을 팔아서 현금화 했다면 그걸 갖고 가만히 있으면 역시나 일본놈들한테 고대로 빼앗기게 되겠죠.
그러니 돈 들고 다른 나라로 가는게 낫겠다 싶겠죠.
만주에 가서 2조나 되는 돈을 갖고 있으면 솔직히 밤길이 무서워질듯.
그마저도 일본의 중국침략 상황에서 돈을 갖고 있어봐야 무용지물이며 본인의 목숨만 위태로워질듯.
그 돈을 가장 잘 값어치있게 만드는게 독립운동에 쓰는것이었을듯.
그리고 조선시대에 현재 가치로 재산을 2조나 모았다면, 좀 돈을 쓸어담고 살았던듯.
과연 이분의 행적이 궁금해서 책을 본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투기의 대상지역이지만 110여년 전에는 오롯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환으로 그 많은 재산을 처분한것이 독립유공자만이 할수 있었던 선택이었겠지요.
어떻게 팔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분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서울이며 양평이며 나갈수 없을정도로 소유지가 컸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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