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1번 : 이승만
- 이승만 전 대통령
본관
전주(全州),
이명
호 우남(雩南)
출생-사망
1875(고종 12) ~ 1965
시대
근대, 현대
직업
정치인, 운동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가족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75(고종 12)∼1965. 독립운동가·정치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2.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황해도 평산 출신. 이경선(李敬善)의 아들이다.
3. 활동사항
(1) 청년기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 서울로 이주한 후 1894년(고종 31)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미국인에게 우리말을 가르쳐주며 학비를 벌어 이듬해 8월 졸업하였고, 졸업과 동시에 모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1895년 10월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자, 국모를 시해한 일본의 원수를 갚고 국왕을 구출하여 친일적인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지명수배를 당하였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관헌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하고 이로부터 개화사상에 눈을 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896년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에서 돌아와 협성회(協成會)·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을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개화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당한 뒤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의 주필로 활약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사상 고취와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또한 부패·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적 자문기관으로 중추원(中樞院)의 설치를 주장하다가 1898년 황국협회의 무고에 의해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어 탈옥을 시도하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뒤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이해 겨울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루스벨트(Roosevelt, T. D.) 미국대통령을 만나 한국에서 일본의 침략을 퇴치하는 데 협조하여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미국에 머물면서 학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하였다. 1908년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 일제강점기
1910년 8월 한국이 일제에 강점 당하자, 9월에 귀국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들을 지도하였다. 1912년 일제가 조작한 이른바 '105인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선교사들의 주선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191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기 위하여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3년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학원(韓人學院)을 운영하고, 1914년 ≪한국태평양≫을 창간하여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 열강, 특히 미국정부와 미국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외교정책을 펴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7년 호놀루루에 기독교 학원과 독립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을 위한 인재 양성에 힘썼으나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한인학교·교회 등의 경영권 논란과 공금 유용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여 교포사회의 대립과 분열을 초래하였다. 이후 한성정부·노령정부·상해임시정부 등 3·1운동 이후 국내외에 설립된 모든 정부조직에 대통령·수상·총리 등으로 추대되었고,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초대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나 대통령제를 주장하고 자신이 스스로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하여 임시정부 내에서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임시정부의 직제를 대통령제로 고치게 되었고, 워싱턴에 구미위원부의 책임을 맡아 외교활동에 주력하였지만 미국 관리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반대에 봉착하였다. 1920년 12월 상해로 건너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워싱턴군축회의에 대비하기 위하여 1921년 5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상해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머물러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서의 직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여 임시정부의 활동에 제약을 주었다. 이후에도 위임통치안 제출설 등으로 임시정부 내에서 계속 논란이 되다가 1922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이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하고, 1925년 3월에는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임시정부의 모든 결정을 무시하고 구미위원부를 통하여 독립을 위한 활동을 독단으로 계속하였다.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워싱턴·하와이 등지에서 항일투쟁과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Francesca, D)를 만나 1934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혼인하였다.
(3) 광복 후
1945년 광복을 맞아 이해 10월에 귀국하여 민주진영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총재,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좌우합작 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거부, 김구(金九)의 남북협상에 대한 반대, 반공 및 단독정부의 즉각적인 수립을 주장하여 단독정부수립노선을 지속적으로 견지하였고, 미군정의 용공정책에 반대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되어 초대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제헌 과정에서 내각책임제 헌법초안에 강력히 반대하여 대통령제로 헌법이 제정되도록 하였으며, 제헌국회에서 초대대통령에 당선되어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과 함께 취임하였다.
(4) 대한민국 수립 후
집권후 철저한 반공의식으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고자 하였다. 1950년 6·25 때에는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도움을 얻어 공산군에 강력 대응하였고, 전란 중 국토가 분단된 상태에서의 휴전협상에 강력히 반대하면서 북진통일을 주창하며 이에 대한 강력한 의지 표현으로 1953년 6월 남한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반공 애국포로 2만7,000여 명을 유엔군의 양해 없이 단독으로 석방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한미 양국은 휴전 후에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조건으로 그 내용을 수락하였다. 한편 6·25로 정부가 부산에 피난해 있던 1951년 12월 23일, 이듬해 치러질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 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하여 자유당을 창당하고, 이듬해 7월 4일 휘하의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야당 국회의원을 납치, 감금하는 등 변칙적인 방법으로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강압적으로 통과시키고 4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재선되었다. 1952년 1월에는 우리나라 연안수역 보호와 일본으로부터의 해양 주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평화선(平和線)을 선포하여 일본과의 어업분쟁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고 공산세력의 연안 침투 방지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후 1954년 11월 자신을 3선 금지조항으로부터 면제시키고 국회의 국무원 불신임권을 삭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일단 부결된 것을 사사오입(四捨五入)의 논리를 적용시켜 변칙 처리시켰다. 이에 따라 1956년의 선거에 다시 출마하였으며, 상대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申翼熙)가 투표 며칠 전에 사망하자 투표권자 56%의 지지를 얻어 세 번째 당선되었다. 1958년 12월 24일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무술경위를 동원하여 야당 의원들을 폭력으로 의사당에서 몰아낸 가운데 새로운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여러 관계 법령을 개정하고 특정 재벌에 대한 특혜를 주는 등 실정을 저질러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이때 통과된 법안 중에서 <지방자치법> 개정안은 차기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방자치단체의 장을 선거제에서 임명제로 개정하여 관에서 임명한 각급 지방자치단체장을 선거운동에 동원함으로써 선거 준비에 만전을 기하려는 것이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趙炳玉)이 또다시 선거 전에 사망하여 4선이 확실해졌으나 자신의 후계자로 지정한 자유당의 부통령후보 이기붕(李起鵬)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하는 등 대대적인 부정을 감행하였다. 이 결과 자신과 이기붕이 정·부통령에 당선되기는 하였으나 학생을 비롯한 민주세력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4·19혁명이 일어나 더 이상 사태를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외무부장관이 되어 수석국무위원으로 있던 허정(許政)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야하였으며, 그를 추종하던 자유당정권이 붕괴되자 그해 5월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독립투사로서 철저한 구국운동을 하였고 대한민국정부 수립에 큰 공을 세워 한때 국부로 추앙 받았지만,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하여 여러 차례 불법적인 개헌을 하고 정적과 야당을 탄압함으로써 정치발전에 지장을 주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융통성 없는 강경책으로 일관하여 국가 발전에 부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유해는 하와이에서 국내로 옮겨와 가족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독립정신≫과 ≪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
기호2번 : 윤보선.
정치가.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입후보하여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5·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1962년 사임하고, 1963년 민정당을 창당하여 그 해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출마,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실패하였다.
호
해위(海葦)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충남 아산(牙山)
주요저서
《구국(救國)의 가시밭길》
↑ 윤보선전대통령생가 /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중요민속자료 제196호. 마을 한가운데에 있으며 전체 평면은 "巴"자형.
호 해위(海葦). 충남 아산(牙山) 출생. 영국 에든버러대학을 졸업하고, 8·15광복과 더불어 정계에 투신,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에 취임하였다. 이어 한영(韓英)협회장·민중일보사 사장 등을 지내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발탁되었으며, 1949년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그 후 대한적십자사 총재·상이군인신생회 회장 등에 추대되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7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입후보하여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1962년 사임하고, 1963년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여 그 해 대통령선거에 대통령후보로 출마,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실패하고,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5년 민중당(民衆黨)을 창당하고, 1966년 신한당(新韓黨)을 창당하여 총재에 취임하였는데, 4자회담을 거쳐 신한당과 민중당을 통합,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출마, 박정희에게 또 패배하였다. 1970년 국민당(國民黨) 총재에 취임하고, 1979년 신민당 총재 상임고문에 추대되었다. 저서에 《구국(救國)의 가시밭길》이 있다.
기호3번 : 박정희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BC15C815D76CB1917X0
호
중수(中樹)
생졸년
1917 - 1979
시대
대한민국
본관
고령(高靈)
활동분야
군인 > 군인
[관련정보]
[상세내용]
박정희(朴正熙)에 대하여
1917년∼1979년. 군인·정치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제5·6·7·8·9대 대통령.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중수(中樹).
1. 출생과 일본군 장교 생활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빈농인 아버지 성빈(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儀) 사이에서 5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 문경소학교에서 3년간 교직생활을 한 다음,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제2기생으로 입학, 군문에 들어갔다.
이 군관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수료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전학, 1944년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관동군(關東軍)에 배치되었다.
2. 광복 후 군인생활
광복 때까지 만주와 화북지방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쟁에 가담했다가, 1946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제2기로 졸업하고 육군대위로 임관하였다.
한국전쟁 동안 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다 1953년 장군이 되었다.
1954년 제2군단 포병사령관, 1955년 제1군참모장, 1960년 육군군수기지사령관, 제1관구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1년 제2군부사령관으로 재직중, 군부쿠데타를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고 있던 1949년, 사상관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당시의 신문보도에 의하면 여순반란사건 관련 공산주의 혐의자로 되어 있는데,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육군본부의 동료·상사들의 구명운동에 의하여 복역은 면제되었다.
이 때문에 한때 군인의 신분을 박탈당하였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현역으로 복적되었다.
1950년 육영수(陸英修)와 결혼하였다.
3. 군정시대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8년5개월간을 집권하였는데, 그의 통치시대는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4·19의거로 성립된 민주당정부를 무능·부패 정부로 규정하고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일단의 장교들은 쿠데타 성공 후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 삼권을 장악하였다.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 이를 통해 입법·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를 행사하였다. 그 의장은 박정희였다. 이로부터 2년7개월간 군정이 실시되는데, 최고통치권자인 최고회의의장 박정희는 먼저 구질서의 전면적인 개혁이라는 목표 아래 모든 정당·사회단체의 해체를 포고하는 한편, 용공분자와 폭력배의 검거에 착수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그해말까지 3,000여명의 용공분자와 4,000여명의 폭력배를 체포하였다. 군사정부는 〈농어촌고리채정리령〉을 발표하였으며 부정축재자에 대한 가차없는 조사를 실시하였다.
사회기풍을 바로잡기 위하여 댄스홀·고급요정 등 모든 환락가의 문을 폐쇄하게 하였으며, 비밀댄스홀에서 춤을 즐기던 남녀를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최고 1년6월의 징역을 선고하였다.
쿠데타 1개월이 못 되어 전국적으로 보안관계 범법혐의자의 검거수만도 3만5000여건에 달하였다는 사실은 군정 초기에 얼마나 철저한 구악일소작업과 강력정치가 진행되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군사정부는 국민운동본부를 설치, 생활간소화·가족계획·문맹퇴치사업을 벌이는 한편, 친선방문외교·초청외교 등 적극외교의 자세를 보였다. 획기적인 경제조치의 하나로 단행된 통화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군정 초기의 집권세력 내부에는 주류파와 비주류파 사이에 주도권쟁탈전이 벌어져 일련의 반혁명사건이 꼬리를 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주류파는 완전히 거세되고 박정희 중심의 주류세력이 실권파로 정권장악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군정 후반은 민정이양을 둘러싼 공방으로 전국이 소란하였다. 박정희는 처음에는 2년 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민정이양일정을 발표하였으나 1963년 1월부터 시작된 정치활동재개 이후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서는 이른바 ‘2·27선언’을 통하여 자신의 원대복귀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4·8조치’로 군정연장을 계획하였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철회하는 등 번의를 거듭하였다. 이동안 군정은 이른바 ‘4대의혹사건’을 저질러 국민들로부터 ‘구악을 뺨치는 신악’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4. 제3공화국 시대
박정희는 1963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단일후보인 윤보선(尹潽善)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대통령취임사를 통해 박정희는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안정을 목표로 대혁신운동을 추진함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제3공화국의 박정희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작업은 경제발전과 한·일국교정상화였다. 박정희는 이미 군정기간인 1962년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 추진하였다. 사회경제적인 악순환을 지양하고 자립경제확립을 위한 기반구축을 목표로 한 제1차5개년계획은 당시 후진국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국민총생산(GNP)성장률인 연평균 7.1%를 책정하였다.
그러나 계획 자체의 졸속과 무엇보다도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 부족으로 제1차5개년계획은 전반적으로 실적미달이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확보와 미국의 압력이라는 복합적인 이유로 추진되었다. 박정희는 집권하자마자 대일협상에 강한 의욕을 보였으며, 이미 군정기간인 1961년 10월에 일본 동경에서 제1차한·일회의가 열렸다.
이와 함께 실무교섭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박정희는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일본수상과 회담하는 등 한·일문제 타결에 열의를 보였다. 이같은 대일자세는 ‘친일외교’·‘흑막외교’라는 비난을 받았다.
박정희정부의 대일저자세시비는 제3공화국 의회 벽두에 대통령국회출석결의안 등으로 논란될 만큼 국민의 대일감정을 자극하였다.
특히 한국어민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어업 및 평화선문제와 이른바 ‘김·오히라메모(金·大平memo)’로 결정된 6억달러의 대일청구권자금은 여론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한·일문제를 둘러싼 여야와 정부·국민간의 공방은 ‘6·3사태’ 등 한때 정국의 위기까지 불러일으켰으나 박정희정부는 반대의견을 물리치고 일을 성사시켜 결국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한·일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으로부터의 자금도입과 기타 차관 등을 통하여 제3공화국 후반부터는 급속도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고성장·수출드라이브·산업기지건설 등을 통하여 국정에 자신감을 가졌으며, 이와 함께 점차 독재성향을 띠어가기 시작하였다.
한일회담 타결, 월남파병 등으로 미국으로부터도 신임을 얻은 박정희는 강한 권력욕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는 1968년 3선개헌으로 나타났다.
5. 유신시대
1972년 10월 박정희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정부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한 후, 이 헌법에 따라 제8대대통령에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였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을 막강한 것으로 보장해줌으로써 박정희에게 독재체제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 체제 아래서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였다. 유신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주장이 야당과 재야세력에서 광범위하게 대두하였으나, 박정희는 이를 ‘대통령긴급조치’로써 탄압하였다.
유신체제 7년간 수많은 정치인·종교인·지식인·학생들이 긴급조치에 걸려 투옥 당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여론도 한국의 강압정치를 비난하였으나 박정희는 굽히지 않았다.
독재적인 통치에 의해 박정희정부는 이 기간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나드는 고도성장이었고 국민소득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빈부격차를 가속화시켰고, 황금만능사상으로 사회갈등과 함께 국민정신문화를 크게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한편,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국가안보면에서 빈틈없는 태세를 구축한 것은 박정희의 공으로 기록될만하다. 박정희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대화에 힘써 한동안 남북적십자회담·남북조절위원회회담 등을 열었고, 남북간 밀사교환을 이루었으나 대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박정희는 1979년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부마사태(釜馬事態)’가 절정을 이루던 때,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측근의 한 사람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쏜 총탄을 맞고 죽었다. 그와 함께 유신체제도 끝났다.
[참고문헌]
五·一六軍事革命史(軍事革命史編纂委員會, 1962)
國家와 革命과 나(朴正熙, 向文社, 1963)
朴政權18年
그 權力의 內幕(李祥雨, 東亞日報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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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현석(玄石)이고, 자는 서옥(瑞玉)이고, 강원 원주(原州)에서 태어났다. 1941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를, 1943년 7월 만주 국립대동학원(國立大同學院)을 졸업하였으며,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대동학원을 졸업한 뒤 광복 때까지 만주국 관리를 지냈다. 1945년 광복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옮기면서 농림행정에 종사, 19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를 거쳐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기호 5번 : 전두환 군인 겸 정치가. 신군부가 12·12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유치, 무역흑자 등을 이루었으나,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1951년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1969년 육군본부 수석부관을 지냈다. 1970년 백마부대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지냈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초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그해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신군부가 12·12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었다.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22일 예편하였으며,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유치, 무역흑자 등을 이루었으나,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고, 대통령 단임제를 실천하였다. 물러난 뒤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비자금사건과 관련되어 사법처리되었다. 기호6번 : 노태우 한국의 군인·정치가. 제13대 대통령(재임 1988~1993). 내무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대통령 재직 중 러시아, 중국과의 국교를 수립하였다. 무궁화대훈장, 보국훈장 국선장(國仙章), 을지무공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대구에서 태어났다. 1955년 육군사관학교, 1968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74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공수특전여단장과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등을 역임하였다. 1979년 ‘12·12사태’에 가담하여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민주정치세력 진압 등 신군부세력의 정권획득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 참여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한 후 외교안보담당 정무제2장관, 1982년 체육부장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 1983년 서울올림픽대회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정의당(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정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6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6·29선언’을 발표, 정국(政局)을 대화합의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8월 민정당의 제2대 총재, 12월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년 제6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0년 2월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과 함께 3당을 합당하여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킴으로써 4당체제에서 양당체제로 정계를 개편하였다. 그 해 6월과 이듬해 4월에 러시아 대통령 M.고르바초프와의 정상회담으로 한·러 국교회복에 새 전기를 마련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북방외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95년에는 재임기간 중에 비자금을 모금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찰에 구속, 재판을 받는 등 대통령 재직시의 사건으로 불명예스러운 일을 겪었다. 무궁화대훈장, 보국훈장 국선장(國仙章), 을지무공훈장 등을 받았으며, 저서에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가 있다.
기호7번 : 김영삼
경남 거제(巨濟) 출생. 195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무총리 장택상(張澤相)의 비서가 되었다. 1954년 26세의 최연소자로 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5·6·7·8 ·9·10·13·14대 의원에 당선됨으로써 9선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 사이 민주당 대변인 2번, 민중당 등 야당 원내총무 5번을 역임하고 1974·1979년의 신민당과 1987년의 통일민주당 등 야당총재를 3번 지냈다.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 총재가 되고 그해 12월 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9년 6월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한국 정치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盧泰愚),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金鍾泌)과 통합, 민주자유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기호8번 : 김대중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한국의 정치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99년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24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났다. 호적상 출생일은 1925년 12월 3일(음력)이다. 1950년 《목포일보》 사장이 되었고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3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3~1967년 민주당·민중당·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 8일 도쿄[東京]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후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을 하였고 1994년 귀국,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당시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같은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기호9번 : 노무현
한국의 제16대 대통령.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한 뒤 5공비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고,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퇴임한 뒤 고향인 봉하마을에 귀향하였으나 재임중 친인척 비리로 조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서거하였다.
본관은 광주(光<
정치가, 외교관.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9년 외무부차관이 되었고 1967년에는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었다. 1975년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1979년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그해 제 10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8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1952년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 그해 외무부 차관이 되었고,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이 되었으며, 1964년 말레이시아 대사, 1967년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었다.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왔으며, 1975년 국무총리에 발탁되었다.
국무총리 재임 중인 1979년 10.26사건을 맞아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고, 같은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신군부 세력이 이른바 12·12사태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으로서의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결국 같은 해 8월 16일에 사임함으로써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가 이끈 정부는 '과도정부' 또는 '위기관리정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사임 뒤에는 1981년 4월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지냈다. 2006년 10월 22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1967년 제22차 유엔총회 수석대표를 비롯하여 30여 회에 이르는 국제회의에 참석하였으며, 1970년 한국외국어대학으로부터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밖에 서훈(敍勳)으로는 1970년 일등수교훈장, 1971년 수교훈장 광화대장, 1979년 무궁화대훈장, 198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국내훈장과 타이 정부로부터 받은 백상최고훈장 기사대장 등 10여 종의 외국훈장을 받았다.
한국의 정치가. 9선의원이었으며, 1985년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맡았고,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1990년 민주자유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어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1980년 이후 전두환(全斗煥) 정부에 의해 2년 동안 가택연금되어 정치활동을 못 하였고, 1983년 5월 18일~6월 9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전개, 5공화국하에서의 민주화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1985년 김대중(金大中)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직을 맡았고, 신민당 창당을 주도하여 신한당을 와해시켰다.
1992년 12월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 1993년 2월 취임함으로써 32년간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文民)정부를 출범시켰다. 1994년 마틴루터킹센터가 수여하는 세계적인 인권운동 평화상인 비폭력평화상을 받았으며 1995년 뉴욕에서 열린 국제연합 50주년 기념총회에서 연설하였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같은해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 귀국하여 김영삼(金泳三)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1991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6월에는 미국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하는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1월 자유민주연합과의 내각제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출범시켜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향상 그리고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노력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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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대한민국의주적은?북괴임..
대통령이 우짜다가 됐는지 참...소 뒷걸음질하다가 쥐잡은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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