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 반대 투표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실에서 새로운 공지를 올렸다.
‘2026년 관리규약 개정안’
QR코드를 찍었더니 100개가 넘는 규정이 나왔다.
‘뭐지?’ 대충 훑어보던 나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 전 내가 문제를 제기했던 주차장 인력 문제가 신규 규정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놀고 있는 불필요한 주차장 인력을 감축하거나 경비원으로 재배치하라고 지적했더니, 마치 내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주차장 관련 규정을 새로 만들어 ‘상시 배치’라는 문구를 집어넣어 놓았다. 아예 그 안건 제기를 막겠다는 의도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관리규약 곳곳에 ‘허위사실 유포’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입주민이 관리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언제든 허위사실 유포로 몰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규정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관리소장, 아주 자기 세상이라고 생각하시는구나.’
이게 정말 입주민들을 위한 관리규약이 맞는 걸까?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규정 몇 가지를 짚어 카페에 글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그 글을 단톡방으로 퍼 날랐다.
“어머… 카페 글 다들 좀 보세요! 이번 규정 개정안에 문제점이 엄청 많은데요?”
그제야 입주민들이 하나 둘 QR코드를 찍어 보기 시작했다.
100개가 넘는 규정.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입주민 중 몇 명이나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고 이상한 점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일단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단톡방은 순식간에 술렁였다.
“이거 뭐예요? 왜 관리실에만 유리하게 규정이 바뀌는 거죠?”
“챗지피티로 한번 돌려봤는데 입주민들한테 너무 불리하게 바뀐다는데요?”
“이런 건 도대체 누가 만든 거예요?”
“입주민을 위한 규정이 아니라 관리실을 위한 규정이잖아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동대표가 등장했다.
“현재 입대의 의결로 찬성된 안건이며, 주민 찬반 투표를 통해 결정될 예정입니다.”
입대의에서 이미 의결을 마쳤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기가 찼다.
“지금 당장 투표를 중지하고 규정안을 전부 재검토해서 다시 투표에 부치세요.”
그러자 돌아온 답변은 더욱 가관이었다.
“마음에 안 드시면 반대 투표하시면 되구요. 찬성으로 결정되면 다음번 개정 때 의견을 반영해 보겠습니다~”
…이게 무슨 태도인가?
입주민들에게 불리한 규정을 그대로 통과시켜 놓고, 일단 찬성으로 결정되면 나중에 고쳐보겠다고? 지금 잘못된 규정을 바로잡으라는 입주민들의 요구는 들을 생각도 없다는 뜻인가?
그 순간 확신했다. 적어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에게는 동대표라는 자리가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입주민을 대표하라고 뽑아 놓았더니, 정작 입주민의 목소리에는 귀를 닫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주차장 인력 배치에 관해 물었다. 우리 건물 지하 1층은 구조상 주차관리원이 상시 근무할 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계약서에는 인원이 3명, 알아보니 지하 1층에 한 명, 지하 3층에 두 명이 배치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단톡방에 물었다.
“혹시 지하 1층에서 주차관리원분 보신 분 계실까요?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 그러자 또다시 그 동대표가 튀어나왔다.
“자꾸 지하 1층에 사람이 배치되어 있다고 주장하시는데, 지하 3층에서 세 명이 3교대로 근무합니다. 사실관계부터 확인하세요.” 뭐라고? 왜저렇게 공격적으로 반응하지? 내가 잘못안건가? 찜찜한 마음에 다음 날 관리실에 전화했다.
관리실 직원은 분명히 지하 1층에 한 명, 지하 3층에 두 명이 배치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하 1층에 배치되었다는 그 직원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분은 지금 어디에서 근무하고 계신가요?” 돌아온 답변은 명확하지 않았다.
“어딘가 돌아다니고 계실꺼예요~”
‘이거 뭔가 수상한데…….’ 입주민 그 누구도 그사람을 본적이 없고, 정작 어디서 근무하는지는 확인이 안 되고.. 도대체 그사람이 존재하긴 하는걸까?
나는 다시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관리실에 직접 확인했습니다. 지하 1층에 한 명, 지하 3층에 두 명이 배치되어 있다고 답변받았습니다.” 다음 날, 그 동대표가 다시 나타났다. 관리실에 확인해 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과 한마디 없이 남긴 말은 단 여섯 글자였다.
“확인감사합니다.”
아니, 잠깐만. 사실관계부터 확인하라며 나를 몰아붙이더니, 정작 본인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으면 사과 한마디쯤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참 대단하다. 입주민을 향해서는 사실관계를 운운하면서, 본인의 발언에 대해서는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모습이라니.
그러던 중 단톡방에서 관리규약 개정안에 대한 비판이 계속해서 쏟아지자, 그 동대표가 이번에는 아파트 카페에 직접 글을 올렸다.
제목은 ‘아파트 관리규약 개정과 관련하여’.
개정안의 각 항목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며, 하나하나 필요에 따라 개정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쉽게 말해, 문제없으니 믿고 따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글은 오히려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뭔데 관리실을 이렇게 감싸는 거죠?”
“혹시 관리실 직원인가요?”
“저게 말이 되는 규정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입주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해명하려고 올린 글이 오히려 관리실 편을 든다는 인상만 더욱 강하게 만든 것이다. 여론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게시글은 감쪽같이 삭제되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규정은 입주민들에게 불리하게 만들어 놓고, 비판이 나오면 해명 글을 올렸다가, 여론이 나빠지면 삭제라니. 이제는 그 동대표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관리실을 향한 그의 무한한 신뢰는 참으로 놀라웠다. 문제는 그 신뢰가 입주민들의 신뢰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키보드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장문의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목은 ‘동대표들에게 묻습니다’.
그동안 관리실에서 벌어진 각종 문제들, 그 문제들을 제대로 짚어내기는커녕 관리실의 거수기 역할만 하는 동대표들의 행태를 하나하나 정리했다.
입주민을 대표하라고 맡긴 자리에서 정작 입주민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글을 통해 동대표들의 사퇴를 요구했다.
그리고 해임 안건에 동의하는 입주민들은 연락해 달라고 덧붙였다.
글을 올리고 나니 솔직히 걱정도 됐다. 과연 누가 나서줄까?
괜히 나만 유난 떠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건 아닐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이런 일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저도 서명에 동참하겠습니다.”
“저도 참여할게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야 알겠네요.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그렇게 입주민들을 직접 만나 동대표 해임 안건을 위한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함께하겠다고 나선 분들은 대부분 젊고, 생각이 깨어 있는 분들이었다. 무조건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는 건물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분은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서명에 참여해 주셨고, 어떤 분은 고맙다며 간식까지 챙겨 주셨다. 예상치 못한 따뜻함에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사실 그동안은 외로운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관리실과 부딪히고, 동대표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 같아 답답했던 순간도 많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단지 사람들이 몰랐을 뿐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알게된 조용히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서명지를 받아 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혼자가 아니구나. 관리실이 아무리 입주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동대표들이 아무리 모른 척한다고 해도, 결국 이 건물의 주인은 입주민들이다.
그리고 이제, 그 입주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7편 올려주세요
현기증 납니다.
글도 잘쓰시고 논리정연 하시고.
스트레스 조심하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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