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자 이덕일 선생님이 지난 2011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광화문에 나의 동상을 세워놓고 10월 9일을 한글날로 기념한다는 사실을 내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들이 지금 쓰고 있는 말과 글을 볼 때마다 화가 치민다. 심지어 한강 남쪽에선 영어 발음 잘하게 한다고 어린아이들 혓바닥 수술까지 한다는구나. 현재의 한글 맞춤법통일안으로는 영어의 R과 L을 구분 못하고 B와 V, P와 F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구나.
내가 이런 절름발이 훈민정음을 만든 줄 아느냐? 왜인(倭人)들이 우리 말글을 말살하려던 1940년에 경상도 안동에서 내가 만든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세종 28년 발간)』이 발견된 것이 우연인 줄 아느냐? 나는 우리말과 다른 겨레의 말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말들을 적으라고 병서(竝書)와 연서(連書) 원칙을 만들었다. 초성을 두 개 이상 자유롭게 사용하라는 것이 병서(竝書)다. L은 ‘ㄹ’로 적고 R은 ‘ㄹㄹ’, 또는 ‘ㅇㄹ’ 등으로 적으면 두 발음을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이다. B와 V, P와 F는 모두 입술소리인 순음(脣音) 아니냐? 그중 하나를 입술가벼운소리인 순경음(脣輕音)으로 표기하는 것이 연서(連書)다. B를 ‘ㅂ’으로 적으면, V는 ‘ㅸ’으로 적고, P를 ‘ㅍ’로 적으면, F는 ‘ㆄ’으로 적으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원칙만 사용해도 영어는 물론 세계의 거의 모든 발음을 대부분 적을 수 있고 발음할 수 있다.
왜인(倭人)들이 너희를 점령하고 2년 후(1912년)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을 만들면서 내가 만든 훈민정음을 난도질했지 않느냐? 누가 다양한 모음을 내는 아래아(·)를 없애라고 했느냐? 누가 ‘ㄱ, ㄴ, ㄹ, ㅁ, ㅂ, ㅅ, ㅇ’과 두 글자 받침 ‘ㄺ, ㄻ, ㄼ’의 열 가지만 받침으로 인정하라고 제한했느냐? 누가 설음 자모 ‘ㄷ, ㅌ’ 등과 ‘ㅑ, ㅕ, ㅛ, ㅠ’를 결합하지 못하게 했느냐? 누가 ‘ㄹ·ㄴ’이 어두(語頭)에 오면 강제로 ‘o’으로 발음하게 하는 두음법칙(頭音法則) 따위를 만들어 우리 아이들을 반벙어리로 만들라고 했느냐?
모두 왜인들과 그에 붙은 역도(逆徒)들의 짓거리가 아니냐? 왜인 지배 때는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나라를 되찾았으면 나의 훈민정음 창제 원칙대로 돌려놔야 하지 않느냐? 이런 절름발이 글자를 가지고 내가 만든 훈민정음이라고 우기려면 내년부터는 한글날을 없애라. 내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이 문제가 바로 잡힌 이후에야 후손들이 바치는 제사를 흠향(歆饗)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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