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교육을 위해 다시 올립니다.. ^^"
중복 양해바래요~~~
1980년 광주사태는 1975년 월남에서 일어났던 거짓 민주화항쟁과 100% 일치한다.
한국에서 1980년 5.18 광주사태의 기원은 1979년 10월 2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 2월 김대중 당시 신민당 대통령후보는 『10·26이 없었다면 10월29일엔 광주에서 터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일사천리로 북상했을 겁니다. 김재규(金載圭)는 그 민중운동의 맥을 끊어 놓았읍니다. 그런 방법으로 민주화는 절대 안됩니다』고 말했다. 일사천리로 북상한다는 것은 일사천리로 시민군이 수도를 점령하겠다는 것이었다. 광주사태는 이미 1979년 10월에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1980년 2월 김대중이 이 발언을 한 바로 그 시점부터 김일성은 광주사태를 일으킬 준비에 착수하였다.
노무현은 남한 군사력 덩치 때문에 북한군이 절대로 남침하지 못한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면, 무엇이 1975년 3월 월남판 광주사태였던가? 그것은 월남군 군사력 덩치가 월맹군보다 20배나 더 컸음에도 월맹군이 월남판 광주사태 일으켜 일사천리로 수도 사이공을 함락하고 대통령 항복을 받아낸 사건이었다. 아무리 월남 군사력 덩치가 20배나 더 컸어도 대통령이 적군에게 체포되고 나니 국군통제권은 공산당 손에 넘어가 버렸다.
만약 노무현의 논리대로라면 월맹군의 남침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러나 안보불감증으로 주적을 잃은 월남군은 총 한방 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월맹군이 중부지방에 침투하여 시민군 복장으로 변장하고 폭동을 일으키며 수도 사이공을 향하여 침략하기 시작하자 안보불감증에 빠졌으며 좌익이 장악하였던 월남 언론들은 월남 중부 지방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고 보도하였다. 다낭 주민들은 공산군이 점령하였는데도 정부가 손을 쓰기는커녕 오히려 신문에 민주화운동으로 보도된 것을 보고 패닉 상태에 빠져 사이공을 향하여 피난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언론 보도는 전혀 월남 정부의 입장이 아니었으며, 단지 좌익이 장악하였던 언론에 대하여 티우 대통령 정부는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월맹군이 침략하였다는 정확한 사실을 정부가 알리려 하면 독재정권의 언론탄압이라고 맹공격을 해대니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공산군 점령지역으로부터의 피난민 행렬이 커지자 월남군은 더욱더 월맹군과 시민군을, 시민군과 피난민을 구별할 수 없었으며, 함락 직전까지도 사이공 시민들은 월맹군 침략을 까맣게 모르고 그것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언론 보도만 맹신하고 있었다.
-예전 글 끌어 올림-
거의 붕괴가 돼어 버려서 미국이 원조해준 무기 가지고 제대로 싸울수도 없는 상황이었죠
참 무서운게 장비나 화력에 의존하던 군대가 그 강점을 유지 시킬 능력을 상실했을때
거의 붕괴가 돼는거죠 이게 장개석부터 남베트남까지 패망까지 비슷한 스토리인데
북한이 한미 관계 이간질 시키려는 이유가 이거죠 뭐 미국과의 관계만 끊어놓으면
수도권 점령전정도는 가능하다는 야심을 가지는 이유
그 지원 받을수 있을만큼에 관계는 나라가 두쪽나도 지켜내야 하는데
미국도 한국이 중국 영향권으로 들어간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고 해서 한국에 대한 의심도 많고 반미 사건 한방 일어나면 그게 도화선되어 한미관계 절단 나지 않을까 걱정도 돼네요
빈라덴 실예 미군철수하면 전시됨 전시합의하다
김씨왕조 만세부름
자기 혼자 살겠다고 탈북해서 미국 망명신청 망명기각!!!! 임천용의 주댕이에
부화뇌동한 보수단체....조갑제가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증언!!!!!!!
결론 믿을 수 없다....
아무리 신출 귀몰햔 북한 특수군이라도 봉쇄된 광주를 어케 살아 나갔을까?
궁금해 죽겠어~~~~ 이건 수꼴통 교육용이구먼
씨부리는 게 참 가관이다
빨갱이 새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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