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자동차사고(인사사고)를 낸 사람이 바로..
친일파. 아니, 민족반역자들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 이 시대에서 광복절을 맞이하는 기분이 찝찝하다. 더군더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국가유공자들의 삶은 비참하며, 그들을 대하는 모든것이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도 찝찝하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국내에서 최초의 자동차 사고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 사고를 낸 것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국내 최초의 자동차사고는 누가??
국내 최초의 자동차사고는 참으로 끔찍했다. 자동차라는 것 자체가 거의 없었던 시절에 일어났던 사고는 당연히, 자동차를 소유하고 탈 수 있었던 부유층이었으며, 대부분 왕족 내지는 민족을 배신한 사람들이었다. 국내 최초의 자동차 사고는 바로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완용'의 아들(이항구)이 7세 아이를 치어 다리를 절단낸 사고였다. 1912년에 민족을 반역하고, 꿀 빨던 민족반역자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와 이완용의 사위 홍운표가 요정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이완용의 자동차에 기생들을 태우고서는 동소문 밖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국내 최초의 교통사고(인명사고)를 낸 것이었는데, 당대 최고의 권세가인 이완용의 아들과 사위라서, 피해자의 부모인 정진협씨와 그의 7살 아이는 다리가 잘려나가도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그저 땅을 치며 통곡할 수 밖에.
"저런 오라질 놈 봤나. 제 아비가 나라를 팔아먹더니, 그 아비에 그 자식이로구먼!"
당시 사람들은 이 자동차사고 기사를 접하고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
근데, 왠지 지금까지도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 뿐일까?
조선(대한제국)은 1910년에 치욕적인 국가의 주권을 빼앗긴 이후, 강제적인 한일합방으로 일제 강점기로 들어가게 되었고, 조선총독으로 취임한 '테라우찌'가 자신의 차와 함께, 고종황제의 어차로 각각 웨슬리 회사의 리무진과 영국의 다임러 회사에 리무진을 주문하였다. 고종황제의 6기통 다임러는 전세계에서 10대밖에 제작되지 않은 귀한 차량이었다고 한다. 고종황제의 차를, 총독이 주문할 때에 주문하여 들여왔다는 것 부터가 치욕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아무나 가질 수 없었던 자동차를 가지고 주지육림(酒池肉林) 에 빠진 세도가 집안 자식들이 대절택시 타고 서울 장안을 일주하는데 쌀 한가마니라는 비싼 가격을 치르며, 자동차를 갖고 놀았으니, 민족을 배신한 댓가는 참으로 달콤했고, 부랑탕들을 제제할 수는 없었으며,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댓가는 혹독하다.
대절택시? 얼마였길래?
1911년도 이전까지 공식적으로 등록된 자동차는 조선황실에 2대, 총독부 1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후 1912년부터 서울에 3대의 대절택시가 운행을 시작했다. 한번 타는데에 쌀 한가마니의 가격을 지불해야 할만큼 엄청난 요금표였다. 1912년 일본의 '오리이' 라는 청년이 포드차를 한대 들여와 대절택시업을 했고, 이후에 서울 을지로에 5대의 포드로, 오리이 자동차 상회를 차렸다. 요금이 비싼만큼, 아무나 이용할 수 없었고, 전화로만 부를 수 있었기에 권세를 자랑하기에는 딱이었던, 주지육림에 빠진 세도가 자식들의 자랑질에 최고의 아이템이었던 것이었다.
민족을 배신한 달콤한 댓가를 그들은 아직도 치르지 않고 있다. 분명, 당시에 7살 어린 사내아이의 다리를 절단내고서도 죄책감 따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민족을 배신한 반역자들에게 그런 양심따위가 있을리가! 국내 최초의 인사사고를 만든 것이 이완용의 아들이라는 점. 역시, 그들답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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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http://www.g-car.co.kr:80/storyG/storyboard_detail.do?seq_no=28205&board_id=STORY_COLUMN
http://hamseo.blog.me/220450946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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